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마이모니데스 의료센터(Maimonides Medical Center) 정신과 레지던트 4년 차인 이원윤(Wonyun Lee) 전문의가 미국의 대안 언론 <매드 인 아메리카(Mad in America)>에 기고한 에세이가 한국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 진영에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한국에서 급진적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살았던 그가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가 된 후, '사회 정의'와 '개인의 회복' 사이에서 겪은 내적 갈등과 깨달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는 서구의 투쟁 방식과 삶의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동양의 철학 사이에서, 진정한 치유는 어디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이 전문의는 한국에서 보낸 성장기를 회상하며 자신을 '분노한 여성'으로 정의했다. 유교적 위계질서와 불교적 순응이 미덕으로 강요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일상이었다. 이원윤 전문의는 "유교 이론은 기존 질서를 정당화했고, 불교의 가르침은 순응을 미덕으로 미화했다"라고 분석했다. 그에게 수용이란 곧 굴복을 의미했고, 굴복은 곧 싸움을 멈추는 것이었다. 반면 태평양 건너 미국은 부당함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존중받는, 끊임없이 위로 상승하는 나라처럼 보였다.
그는 한국의 온라인 급진 페미니즘 커뮤니티인 '메갈리아(Megalia)' 활동에 뛰어들었다. 인터넷의 어두운 구석에서 마주한 현실은 참혹했다. 집단 성폭행 영상이 포르노로 거래되고, 아버지가 딸의 이미지를 성적 콘텐츠로 유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전문의는 "우리는 세상이 변하라고 소리쳤고 우리의 행동주의는 세상을 위한 치료와 같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요지부동이었다. 강간과 차별은 계속됐고, 거대한 구조 앞에서 개인의 노력은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도미 후 정신과 의사가 된 그는 정신건강의 언어가 사회 운동의 언어와 놀랍도록 닮아있음을 발견했다. 사회적 결정요인, 구조적 인종차별, 미세한 차별(microaggressions)이 생물학적 상처를 남긴다는 가르침은 그가 한국에서 가졌던 신념과 일치했다. 이 전문의는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정신건강의 언어가 행동주의(activism)의 언어와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점이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그들의 고통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며 세상이 불공정한 탓이라고 가르쳤다.
이원윤 전문의는 "당신의 고통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이 불공정한 것"이라고 환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는 환자들의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고 도덕적 명료함을 제공하는 강력한 공감의 도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이 접근법에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상의 불공정함을 강조할수록 환자들은 더 큰 분노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전쟁, 범죄, 폭력으로 얼룩진 헤드라인은 환자들의 상처를 덧내기만 했다.
이 전문의는 "나는 환자들을 더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그는 환자들에게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도록 가르쳐야 했지만, 사회 정의는 통제 불가능한 세상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한국에서 활동가로 지내며 느꼈던 절망감과 맞닿아 있었다. 가해자들은 여전히 활개 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는 무력감이었다.
그때 한 친구의 조언이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한 친구는 "너는 우주를 바꿀 수는 없지만, 누군가의 우주를 바꾸고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이 말은 그에게 치료와도 같았다. 그는 빈곤, 인종차별, 학대 등 실제적 불의에 뿌리를 둔 환자들의 고통을 목격하지만, 단순히 약물을 처방하고 고통을 확인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의 '주체성(agency)'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이 전문의는 투표하고, 목소리를 내고, 자원봉사를 하거나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작은 행동들이야말로 환자들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임을 강조했다. 그는 서구의 치열한 평등 추구에 매료되어 떠나왔지만, 이제는 다시 동양의 가치로 회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명상과 감사, 수용을 환자들에게 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원윤 전문의는 "서양의 정신은 정의를 위해 싸우지만, 동양의 영혼은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고 결론지었다. 진정한 치유는 이 두 가지 접근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를 오가는 데 있었다. 세상의 추악함에 잠식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세상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삶의 불공정함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는 서양의 전사와 동양의 수도승, 그 두 가지 마음을 모두 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번영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 전문의는 현재 컬럼비아 대학교 공공 정신의학 펠로우십에 합류할 예정이며, 정신장애인 회복 커뮤니티인 '파운틴 하우스(Fountain House)'와 협력하며 진단 너머의 사회적, 정치적 힘이 회복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여정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고통받는 한국의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도 '싸움'과 '수용' 사이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우주를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