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재석 169인 중 찬성 169인으로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대안은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정우택 국회부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렸다. 8일 정신건강복지법 일부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2020년 11월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개정법안을 발의한 후 전해철, 양기대, 최혜영, 정춘숙, 강선우, 남인순, 인재근 의원 들이 잇따라 대표발의했던 개정안이 보건복지위원회 대안으로 법사위를 통과하고 이날 마침내 법제화됐다.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개정안에는 동료지원인, 동료지원쉼터의 설치, 절차조력인 제도 도입이 법제화된 것이다. 하지만 발의안들에서 중요한 의제였던 보호의무자에의한입원(강제입원) 제도와 동의입원 제도의 폐지, 가족돌봄의 지원, 공공이송체계 확립 안 등은 대안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개정안에는 일시적 정신건강 위기를 겪는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지역사회에 거주하며 동료지원인 상담 등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동료지원쉼터와 입·퇴원 과정에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절차조력인제도 등이 담겼다.
1995년 정신보건법이 제정된 이후 정신장애인이 정신위기 상황에서 회복을 돕는 기관은 정신병원 등 의료기관이 전부였다. 이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지나치게 긴 입원 기간을 보내게 되고 사회적 관계가 단절돼 퇴원해도 다시 고립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는 지적이 많았다.
동료지원쉼터는 사람과 권리 중심의 정신건강 서비스 중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모범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정신건강 서비스이다. 지역사회로부터 소외와 분리를 방지하고 전통적인 정신건강 서비스 이용을 예방하며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등 쉼터의 효과성이 지속적으로 보고돼 왔다.
국내에는 지난 2022년 송파동료지원쉼터를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이후 현재 3개소가 운영 중이다. 개정안은 국가와 지자체에 쉼터의 설치·운영 권한을 부여하고 인력 기준에 대해서는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도록 했다. 사실상 쉼터의 전국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원래의 명칭은 위기지원쉼터였지만 법사위 자구심사를 거치며 동료지원쉼터로 변경됐다.
절차조력서비스도 눈길을 끈다. 개정안은 국가와 지자체가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입·퇴원에서 충분한 설명과 의사지원을 하도록 규정했다.
절차조력인은 정신장애인의 의견을 보조하고 입원적합성심사와 퇴원, 처우개선 심사 등에 참여해 의사소통 조력, 당사자의 통신 및 면회를 보조할 수 있다.
입·퇴원 과정에서 정신장애인의 의사는 원천적으로 배제돼 왔다.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받으면서 국가인권위원회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절차조력인 제도 신설을 권고한 바 있다.
개정안은 정신건강증진시설의 장이 정신장애인에 절차조력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이용방법 등 구체적 내용을 알리도록 했다.
대체의사결정이 아닌 지원의사결정의 의미를 담은 성년후견제 역시 개정안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지자체 장은 성년 정신장애인이 후견인을 선임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민법에 따라 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개시, 한정후견개시, 특정후견의 심판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정신장애인의 권리를 대변해줄 가족이 없고 권리침해의 위험이 있을 경우 지자체 장은 사람 또는 법인을 후견인으로 선임해 줄 것을 청구할 수 있다.
동료지원인의 양성도 개정안에 들어갔다. 이는 먼저 정신질환에서 회복된 정신장애인이 정신질환을 현재 겪고 있는 동료 정신장애인의 일상과 회복을 돕는 제도로 개정안은 국가와 지자체가 동료지원인의 양성을 지원하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 장관은 동료지원인 양성 및 보수교육을 개발해야 하며 양성 과정을 수료한 이에게 동료지원인 수료증을 배부하도록 했다.
이외에도 국민 생애주기에 따른 정신건강서비스의 제공, 우울·불안·고독과 관련한 상담의 제공, 재난심리지원, 권역별 트라우마센터를 통한 심리상담·치료 등이 개정안에 담겼다.
"누군가 끝까지 주장하는 운동성 없이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됐다". 사진은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회원들이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 통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c)마인드포스 자료사진.
아쉬운 점은 남았다. 그간 선언적 의미에 그쳤던 가족의 돌봄과, 휴식 지원, 정보 교육의 구체적 제공은 개정안에서 빠졌다. 국가 공공이송체계의 확립 역시 배제됐다. 특히 개정안의 이념에 정신질환자의 존엄과 가치, 자기결정권의 존중을 명시하고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 이념을 반영하도록 하는 내용도 제외됐다.
신권철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정안은) 여야가 의견이 갈릴 만한 보호의무자 제도 등은 쟁점안은 건드리지 못했다”며 “쟁점 법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이 여나 야나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 통과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신장애단체에서 요구했던 중의 일부이긴 하지만 쉼터나 동료지원가, 절차조력서비스가 들어갔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라며 “개악(改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배점태 한국조현병회복협회(심지회) 회장은 “정신장애인을 장애인복지법에서 제공하는 복지 혜택에서 제외시킨 관련 악법 개정에 이어 국회 본회의 통과로 동료지원쉼터 등 관련 법제화는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배 회장은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법과 제도가 많이 남아 있어 가야 하는 길은 멀지만 법 통과는 희망을 갖고 노력하면 된다는 걸 보여준 결실이었다”고 평했다.
하경희 아주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힘들었던 건 의사들의 반대가 있으면 마지막 관문을 넘기기가 어렵더라”며 “(애초 발의안들의) 입원 제도 등은 합의된 바가 없는 상황이니까 애초에 배제된 건 아쉽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다양한 주체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서 상당히 진보적 내용들을 제안했던 건데 시작 대비 너무 초라하게 남아 아쉽다”며 “얻은 교훈은 누군가 끝까지 이걸 주장하는 운동성 없이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걸 배우게 됐다”고 전했다.
배진영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신장애인사회통합연구센터 부센터장은 “권익 보호와 복지 측면에서 중요한 조항들이 나와 기쁘다. 하지만 발의안에 담겨 있었지만 통과되지 못한 방대한 법 조항들이 있다”며 “진정한 정신건강 복지 시대가 열릴 수 있게 더 많은 법제적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 e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