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인식 변화, 언론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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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인식 변화, 언론에 달렸다

발라드 0 45 11.11 17:23

2025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미디어의 이야기, 세상을 바꾸다’

오는 10일은 세계 정신건강의 날이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개선하고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1992년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정신건강연맹(WFMH)에서 제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질환은 극복할 수 없는 질병이나 범죄 원인 혹은 사회적 위험 요인으로 여겨진다. 언론의 보도 관행 역시 이런 한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정신건강 보도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새로운 기준을 모색하는 자리가 열렸다. 지난달 30일, 서울시 중구 명동 한 호텔에서 ‘미디어의 이야기, 세상을 바꾸다’라는 주제로 ‘2025년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이 진행됐다. 이번 행사는 한국기자협회와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11월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을 제정한 이후 공동 주최한 첫 심포지엄이다. 행사엔 언론인과 미디어 제작자, 당사자와 가족, 전문가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년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의 참석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 제공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년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의 참석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 제공

정신질환과 범죄의 연관성을 줄여야

1부 첫 번째 발제는 백종우 경희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정신건강 관련 기사 작성을 위한 지식과 정책’이었다. 백 교수는 범죄의 복합적 요인을 무시하고, 정신질환에서 원인을 찾는 언론 보도 관행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2월 대전 초등학생 살인사건, 이른바 ‘하늘양 사건’에서 가해 교사의 우울증 병력이 범죄 원인처럼 보도되면서, 우울증 환자 전체가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년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1부 발제에서 백종우 경희의대 교수가 ‘정신건강 관련 기사 작성을 위한 지식과 정책’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심은진 PD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년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1부 발제에서 백종우 경희의대 교수가 ‘정신건강 관련 기사 작성을 위한 지식과 정책’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심은진 PD

권고기준 제정 과정에 참여했던 지형철 <KBS> 기자는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 제정 과정 및 현장 적용’을 주제로 발표했다. 그는 권고기준 정립 전후의 보도 양상을 비교하며, 이 기준이 실제 현장에서 기자와 언론사에 유용하게 작동하는지를 검토했다.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은 정신질환을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관 짓는 보도를 지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래픽 심은진‘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은 정신질환을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관 짓는 보도를 지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래픽 심은진

권고기준이 제정된 지 3달 뒤, ‘하늘양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당일 지상파 3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사는 ‘우울증으로 인한 범죄’라는 관점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지형철 기자는 당시 사건을 보도했던 기자들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다른 언론사가 다루는 내용을 자신만 다루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압박을 느끼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많은 기자가 스스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울증을 범죄의 원인으로 성급하게 지목해 보도했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며칠 뒤, 전문가들이 가해 교사의 우울증 병력만으로 범행의 이유나 동기를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언론사의 보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MBC>는 2월 13일 “‘우울증’이 살해 원인?…'우울증과 무관한 계획범죄일 수도'”라는 헤드라인을, KBS는 2월 14일 “‘우울증은 살해 원인 아냐'…타인 공격 사례 드물어”라는 제목을, <SBS> 역시 같은 날 “우울증이 범죄 원인? 논리 비약…살해 교사로 낙인 안 돼”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다른 언론사들의 보도도 비슷하게 달라졌다.

지난달 30일 서울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1부에서 지형철 KBS 기자가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 제정 과정과 현장 적용’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 제공지난달 30일 서울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1부에서 지형철 KBS 기자가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 제정 과정과 현장 적용’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 제공

지형철 기자는 그럼에도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 제정 이후 현장에서는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질환 관련 사건을 다룰 때, 진단명 중심 보도에서 벗어나 당사자와 구조적 원인을 함께 조명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들 사이에서 권고기준을 친숙하게 느끼고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을 때, 그 의미와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 기자는 모든 언론사의 내부 가이드라인에 정신건강 보도 기준을 포함하는 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진단명 언급 대신 확인해야 할 다섯 가지

‘당사자 및 가족이 바라보는 미디어’라는 주제 발표에서 김근영 <마인드포스트> 편집부장은 사건 보도에서 진단명을 가급적 언급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진단명을 빼도 사건 이해에 문제가 없는지, △수사나 법원 등에서 공식 확인된 정보인지, △예방 정보로서 실질 기능을 하는지, △단일 원인 인상을 줄 위험은 없는지, △‘정신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 등의 표현으로 충분한지 등을 점검하고,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불명확하다면 진단명 언급을 유예하자는 것이 그의 제언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1부 발표에서 김근영 마인드포스트 편집부장이 ‘당사자와 가족이 바라보는 미디어’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심은진 PD지난달 30일 서울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1부 발표에서 김근영 마인드포스트 편집부장이 ‘당사자와 가족이 바라보는 미디어’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심은진 PD

그는 ‘묻지마 범죄’와 ‘조현병 환자’라는 진단명이 기사 제목에 함께 등장하면, 환자와 가족은 ‘사람들이 범죄자와 똑같이 취급할까 봐 두려워 외출조차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론의 상업주의와 클릭 유도를 위해 정신질환자의 존엄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당사자가 말하는 경험과 문제점

2부 패널토론은 '이야기의 힘, 낙인을 걷어내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김혜민 전 <YTN> 라디오 PD의 진행 아래 백종우 교수, 이하늬 작가, 고하영 유튜버, 정재원 SBS PD, 윤준호 <세계일보> 기자가 참여해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공유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기자로 일했던 이하늬 작가는 조현병 당사자를 인터뷰했던 경험이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2018년 그는 <경향신문>에서 정신장애와 인권 단체 파도손의 이정하 대표를 인터뷰한 ‘저는 조현병 환자입니다. 그리고 괜찮습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기사는 조현병 진단을 받은 이 대표가 8차례 강제 입원을 당하며 겪은 고통과 사회적 편견, 그리고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직접 문제 제기를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끄는 당사자 운동의 필요성을 다뤘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년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2부 토론에서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심은진 PD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년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2부 토론에서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심은진 PD

이하늬 작가는 “이런 이야기도 기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나도 내 이야기를 해보자는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2020년 자신의 우울증 진단 경험을 담은 책 ‘나의 F코드 이야기’를, 2023년에는 조현병을 겪는 삼촌의 이야기를 다룬 ‘나의 조현병 삼촌’을 출간했다.

이 작가는 책을 통해 “아프면 아픈대로의 삶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병을 앓고 있어도 그 나름의 삶이 있고 늘 슬프지만은 않다. 사실 저희는 재미있는 게 더 많다”고 덧붙였다. 삼촌의 조현병 증상이 나타났을 때 오히려 웃음을 자아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는 “정신질환이 항상 비극적인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은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표현과 사진, 영상 등의 사용을 지양하고 있다. 그래픽 심은진‘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은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표현과 사진, 영상 등의 사용을 지양하고 있다. 그래픽 심은진

이하늬 작가는 우울증 기사에는 ‘앉아 있고,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며, 비가 내리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주로 등장하는 점을 지적했다. 조현병의 경우 ‘복잡한 머리를 하고 있거나, 얼굴이 두 개로 나눠진’ 그림이 많다며 언론이 정신질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울증인데 책도 썼네?’ ‘록 페스티벌도 가네?’ ‘자살 시도해 봤어요?’와 같은 질문을 받은 경험을 말하며 “이런 편견과 압박이 당사자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언론인의 성실한 취재가 오해와 낙인을 줄인다

정재원 PD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궁금한 이야기 Y’ ‘SBS 스페셜’을 연출하며 ‘부산 또래 여성 살인사건’과 ‘공군 성폭력 피해자 사망사건’ ‘n번방 사건’ ‘조현병 자녀의 존속 살해 사건’ ‘젊은 여성의 섭식 장애’ 등의 이슈를 다뤘다. 정 PD는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경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주제를 다루지만,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구조를 바탕으로 한 사건 중심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자극성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에서 정신질환과 관련된 내용을 다룰 때 자칫 불필요한 자극이나 낙인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으며, 자신 또한 그런 시행착오를 겪은 적이 있다고 성찰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2부에서 정재원 SBS PD가 방송을 통한 정신질환 보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 제공

정재원 PD는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과 편견을 막기 위해 어떤 장치를 쓰는가"라는 <단비뉴스>의 질문에 ‘제작자의 성실함'을 강조했다. 그는 “진단명을 아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허술해지는 걸 막으려면 제작자가 성실히 취재해 그 공백을 메우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환자들의 실제 모습을 최대한 드러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며, 방송에서 당사자들이 자신의 발병 시기나 관리 방법, 어려운 점 등을 진솔하게 털어놓도록 했던 경험을 공유했다. 정 PD는 특히 영상은 정보가 빠르게 흘러가고, 시청자에게 강하게 각인되는 일부 장면이 전체 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낙인을 강화하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설명했다.

윤준호 세계일보 기자는 기획보도 ‘망상, 가족을 삼키다’의 취재 과정을 소개하며 자신 또한 “당사자 접촉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해당 보도는 매년 20건이 넘는 존속 살해에 주목해 최근 10년간의 관련 사건들의 판결문 823건을 분석하고 원인을 추적했다. 이를 위해 8개월 동안 당사자와 가족, 전문가 등 84명을 인터뷰했고 중증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 의료진이 처한 현실을 비췄다.

지난달 30일 서울 명동 르메르디앙 호텔에서 열린 ‘2025 정신건강 미디어 심포지엄’ 2부에서 윤준호 세계일보 기자가 ‘망상, 가족을 삼키다’ 기획보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 제공

윤 기자는 “존속 살해라는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은 만큼, 기사를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말했다. 그는 독자들이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도록 기사 구성에 신경 썼으며, 중증 정신질환 치료와 회복의 책임을 당사자와 가족에게만 떠넘기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 사건 취재 과정에선 사건 당사자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분석하고 군대 선임까지 만나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각도로 보여주어 대다수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행사 폐회사에서 이상원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관은 “언론과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진 오늘날 정신건강을 다루는 보도와 미디어 콘텐츠가 더욱 세심하고 균형 있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며 “이번 심포지엄이 우리 사회가 정신건강을 더 깊이 이해하고 편견 없는 인식을 확산하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리가 되었길 바란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에 참여한 김근영 편집부장이 일하는 마인드포스트는 정신장애인의 권익과 인권, 정신장애 질환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론사다. 기자의 자격도 정신장애자로 한정하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편견의 중심에 미디어가 있지만, 그 편견을 바꿀 열쇠 또한 미디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심포지엄 참석자들은 여전히 많은 언론과 언론인이 정신질환을 범죄 요인으로 바라보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최근 언론 현장에선 자극적인 묘사 대신 맥락을 제공하고,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는 대신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려는 등 유의미한 변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 말했다.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씌워진 편견과 낙인을 걷어내는 일은 언론과 미디어의 이야기 방식 변화에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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